다 읽은 지는 꽤 됐는데 원고 기간이 바로 닥쳐서 감상을 못 썼네요. 덕택에 벌써부터 내용 디테일이 가물거리고 있구요 ㄱ-...
아무튼. 개인적으론 가이도씨 작품 중에서 바티스타 다음, 제너럴과 동급으로 잘 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제 개인적인 선호도는 바티스타>제너럴(개선)>>제너럴(전설)>>>>넘사벽>>>>>그 외 다른 작품들 순서였어요) 이야기 구조와 등장인물의 다채로움을 따지자면 오히려 제너럴보다도 위일지도요.
* 가이도씨가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회의 의료 시스템 문제와 다양한 캐릭터, 그리고 크고 작은 사건을 얽어서 짜낸 구조가 제법 정교합니다. 커다란 축이 되는 사건과 인물들이 다층적으로 연관성을 가지는데, 이게 처음에는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에 가서 휘몰아치면서 사실 모든 것이 악연으로 얽혀있었다는 사실이 펑 터지는 구조예요. 사실 이런 구조는 클리셰라서 잘못 쓰면 아침 드라마가 되는데, 나전미궁은 꽤 준수하게 썼다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어두운 과거와 상처는 있다' 스타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도 그냥 쭉 따라가며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끊어지지 않는 악의의 무한 루프. 악연과 인과와 복수. 일족의 몰락. 지나치게 강대한 사회 시스템과 그 속에서 질식하는 개인. 삶과 죽음을 컨트롤하려는 인간의 욕망. 살인과 자살. 이런 비극의 다양한 요소가 얼키고 설켜 인간과 사건의 다채로운 면면이 한 이야기로 묶여 있는 책입니다. 마치 나전의 오색빛처럼.
* 주인공 텐마 다이키치는 왠지 다구치과네요. 좀 맹해보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유급쟁이 의대생. 별명이 언럭키 토네이도일 정도로 운이 없는데다가 미스 도미노 히메미야까지 가세해서 구르고 깨지고 바보짓 하는 탓에 초반은 유쾌 소동극 같은 분위기예요. 뒤로 갈 수록 사쿠라노미야 일족의 뒷얘기와 빈사 상태의 종말기 의료 시스템에 대한 폭로, 사쿠라노미야 병원의 데스 컨트롤과 텐마 살인 미수 등의 얘기가 나오면서부터는 한없이 어두워지지만....
* 일전에 가이도씨 작품에는 몰락형 인간상이 많다고 했는데 나전미궁도 예외가 아니네요. 한 사람이 아니라 일가가 몰락하는데, 여타 작품들이 그래도 떠나는 정도로 온건하게 끝낸다면 나전미궁에선 화끈하게(?) 몽땅 태워 죽여버립니다. 물론 마지막 반전으로 사유리가 생존해있다는 장치가 있지만. 가이도씨 작품에서 애초에 죽기 위해 나온 엑스트라(...)가 아닌 주요 인물이 죽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깜짝 놀랐어요.
떡밥을 뿌려놓고 끝냈으니 언젠가는 새 작품에서 회수할 지도 모르겠어요. (얼핏 쿄쿠호쿠 클레이머에서 회수한다는 것 같기도 하고...? 쿄쿠호쿠 서평을 일웹서 대충 훑어보기만 했던지라 정확하지가 않네요)
* 읽고 나면 왜 제목이 '나전''미궁'인지 납득하게 되더군요. 원래 붕괴 시리즈 3부작으로 기획해서 '사쿠라노미야 병원의 붕괴'로 쓰려고 했다는데 그러지 않길 천만 다행;; 그 무슨 재미없는 제목인가요.
단행본의 홀로그램 코팅
저 옵션이면 돈이 얼마야 이미지의 영향도 있고, 작품 자체에서 등장하는 나전의 이미지도 있어서 책을 덮고나면 한동안 눈에 무지개 빛깔로 빛나는 나전의 방이 보이는 것 같아요. 아 정말 그 흔해빠진 수사 기법으로 이렇게까지 명확한 이미지를 독자한테 전달할 수 있다니, 가이도씨의 이야기꾼 기질이 부러워 디지겠어요.....ㅇ<-<
* 나이팅게일 감상문에서도 썼지만, 가이도씨도 꽤나 알레고리 쓰는 거 좋아하네요. 삶-장미, 죽음-나전, 스미레-사유리라는 삶과 죽음을 나눠 떠맡은 쌍둥이 같은 식의. 하긴 나이팅게일이랑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책이니까요.
* 여전히 캐릭터들은 생생합니다. 주인공 텐마 다이키치, 시풍신보 기자 벳쿠 요우코, 사쿠라노미야 일족(이와오, 하나오, 스미레, 사유리, 시체로 등장하지만 아오이), 시라토리&히메미야 콤비, 메디컬 어소시에이츠의 유키노죠 부녀 등등.
다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가다가 갑자기 전지 3인칭이 나오는 등 구조적인 결함이 보입니다. 물론 그 부분은 텐마 1인칭으로는 절대 비추지 못할 부분인데 그게 없으면 이야기의 진행과 가속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 같긴 하지만....
* 에도가와 란포상에 넣었다가 1차 심사에서 떨어졌다는데 그럴 만도 했어요. 미스터리로 분류하기엔 참 애매한 작품이거든요. 사실 가이도씨 작품 중에 제대로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건 바티스타랑 나이팅게일, 청공미궁 정도일까요...? 그나마도 후자 둘은 미스터리로서는 솔직히 실격. 누가 범인인지 뻔히 보이고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이 서투르고 재미없어요. 넴 제가 좀 가이도 선생 빠까입니다...
* 이와오 선생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살아 돌아왔다는 설정인데, 중간중간에 나오는 전쟁 시절 이야기만 가지고는 가이도씨의 역사 의식이 어떤지는 좀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전범국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반성한다기보다는 그냥 일반인이었던 이와오 선생이 남방 전선에서 생지옥을 보고 왔다, 정도의 언급 뿐.
사실 뭐 대다수의 전후 세대 일본 작가들의 태평양 전쟁과 그 앞뒤 역사에 대한 인식이 지극히 피상적이라는 건 기정사실이라 별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만. 왜곡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 반면 다카시나 병원장을 필두로 한 토죠대와 사쿠라노미야 일족의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의 반목은 자칫 공허한 시스템 담론으로 그려질 수 있는 걸 피부에 와닿는 생존 투쟁으로 그렸어요. 가이도씨 작품은 의료인들 사이에서도 '의료계의 [인간들의 집단]으로서의 면모와 공기를 생생하게 그린다'는 평을 듣고 있으니, 역시 작가 본인이 괜히 의사가 아닌 거겠죠.
맨날 속이 시커먼 너구리 원장이라고 말은 했지만, 싱글싱글 웃으며 자기 밑의 사람들(다구치, 하야미, 키요카와 등등)의 뒤통수를 치는(...) 일 이외의 일에서 정말로 '토죠대 병원의 보전을 위해 시커먼 속으로 일을 획책하는' 다카시나 원장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나온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것도 어떤 정당성이나 명분보다는 이기적 생존심의 함량이 높은 사유로 움직이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지만 그런 모습이 싫지는 않아요. 시라토리도, 다카시나 원장도, 사쿠라노미야 일족도 모두 자신과 자기가 소속된 곳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싸우는 모습은 외려 그들의 캐릭터에 깊이와 인간미와 현실성을 더해주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 일단은 여기까지. 재독을 해야 뭘 좀 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원서는 한 번 읽고 나면 발췌독이 아닌 이상 다시 읽기는 싫지 말입니다...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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