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또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 늘 그렇듯이 혼잣말, 반말입니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보 발령.* 기류는 자신을 뛰어넘는 나루미의 잠재적 재능을 알아보고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기술을 전부 가르쳐서 함께 정상에 서자는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읽었던 부분인데 언제인가 곱씹어보다 소름이 끼쳤다. 이미 완성된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여유의 도량에 경외마저 느꼈다.
그러니 나루미도 자신의 손을 그은 메스가 사심 한 점 없는 말 그대로 사고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겠지. 다만 머리로 믿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두 가지의 간극 속에서 마음 가누지 못한 채 방황했을 뿐. 그가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의심을 부추기는 시커먼 심연의 속삭임과, 그럴 리 없으니 의심하지 말라는 이성의 명료한 목소리의 대립 속에서 번민했을 뿐.
* 몇 번 씩이나 생각해봤지만, 난 결국 기류와 나루미가 '함께 행복해지는' 이야기는 쓰지 못할 것 같다.
기류는 행복해질 것이다. 나루미도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의 곁에서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없다. 그래서 나도 그런 이야기는 쓸 수 없다. 몇 번이고 망상해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더라.
바티스타 사건 이후 헤어진 매형제가 언젠가 다시 만나 또 함께 지낼지도 모른다. 떨어져 살면서 종종 만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함께 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의 가능성은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의 막다른 끝은 너무나 가깝다. 명백하게 보이는 끝을 전제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잠시 함께한 둘은 결국 다시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진다면 아마 일생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왜인지는 아직 잘 설명할 수 없다. 그저 그렇다고 내멋대로 확신할 뿐. 이 알 수 없지만 너무나 선명한 확신을 이치에 닿게 조립하고 펼쳐내는 게 내 이야기가, 또 내가 할 일이겠지.
* 기류가 '자신의 실력이 없어 환자가 죽는 게 싫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기술을 갈고 닦았다' 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걸린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왠지 저 말 뒤에 환자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만큼이나 '자신의 손을 믿고 있던 프라이드와 커리어에 스스로 흠집을 냈다는 분함'이 들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류 본인은 아마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분명. 그리고 아마도 그걸 꿰뚫어 보고 건드린 사람이 나루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행간을 너무 꼬아 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안에서 기류는 마냥 베푸는 보살 같은 선인은 아니니까 가능성이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기류는 기본적으로는 곧은 사람이지만, 그 곧은 성정과 목표를 향한 에너지가 지나치고, 때문에 오히려 그 자장에 시야가 왜곡되어 종종 주위를 보지 못했던 에고이스트가 아닐까.
그러한 자기 안의 모순, 에고와 슈퍼에고의 충돌, 이성과 감정의 충돌은 이전까지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일 없이 잠들어 있다가 나루미와 얽히면서 뚜렷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리고 나루미가 기류에게, 기류가 나루미에게 갖고 있던 동류 의식 속에는 이러한 점에 대한 인식도 포함되어 있겠지. 나루미의 손을 그토록 오랫동안 놓고 있지 않았던 것은, 처음에는 단순한 죄책감이었지만 후에는 이런 모순의 동료의식이 자라나 유대가 더욱 견고해졌던 탓이 아니었을까.
* 그런데 기류의 녹내장 때문에 일어난 첫번째 실패 케이스, 그러니까 케이스 26의 경우. 이 경우는 집도의의 과실로 인한 의료사고인 셈인데, 바티스타 스캔들 폭로 때 그 원인을 공표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유가족이 기류를 상대로 의료 사고 소송을 걸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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