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크님 리퀘를 놓친 한스러움을 승화시키며 ㅜㅜㅜㅜㅜ 예전에 쥐가 치즈 파먹듯이 듬성듬성 써놓은 장면을 완성시켰습니다. 이펠 이 초딩샛퀴, 로 내용 요약 가능한 썰렁한 글입니다. 길이와 내용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ㄱ-
“……델.”
“……리델.”
루아리델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이펠리온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라 부르는 것도 못 듣고 있어?”
루아리델은 황급히 아니오, 아무것도, 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펠리온은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앉아있는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는 어느새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제법 길어진 붉은 머리칼 끝을 질끈 묶고 가느다란 금테 세공이 된 안경을 꺼내어 코에 걸쳤다. 양탄자 바닥에 닿는 드레스 끝자락에 시선을 떨구고 있던 루아리델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런 그를 보았고, 처음 보는 모습에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안경은 언제부터……?”
그녀의 물음에 이펠리온은 콧등으로 흘러내리려는 안경을 슬쩍 추어 올려 제자리로 돌려 놓으며 대답했다.
“아아, 안경? 글쎄, 좀 됐던가? 작은 것들이나 먼 것들이 조금씩 흐려 보이기 시작해서…… 정무를 볼 때만 쓰고 있어. 그럴 땐 잘못 보거나 보이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그는 다시 한 번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그렇군요. 저는 여지껏 모르고 있었습니다.’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다시 시선을 내리까는 루아리델을 향해, ‘그래도 우리 예쁜 비마마 얼굴은 아주 잘 보이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라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리고 의자에 길게 기대어 자못 지루하다는 듯한 얼굴로 팔락 팔락 두꺼운 서류뭉치의 페이지를 넘겼다. 열려진 창 밖에서 간간이 바람이 불어들어 짙은 자줏빛의 커튼이 위아래로 부풀었다 사그라들며 펄럭였다. 가끔씩 서류가 넘어가며 내는 종이 소리만이 들리는 사이로, 마차가 내달리는 소리만이 먼 밖에서 희미하게 창문가를 타 넘어 들어왔다. 루아리델은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깍지 끼어 무릎 위에 놓고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최근에 왕성에 돌고 있는 소문을 아십니까?”
“음? 뭔데?”
이펠리온은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평온하게 되물었다. 루아리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애써 다시 힘껏 맞잡아 진정시켰다.
“제국은 곧 베르비스와…… 전쟁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녀의 말에 이펠리온은 무심히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눈매에 일순 차가운 빛이 스쳤으나, 그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며 평소처럼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런. 우리 황태자비께서는 또 어디서 그런 맹랑한 소문을 들으셨을까?”
“대규모의 군사를 테세아트로 내려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직접 명하셨다고 하시니 분명 단순한 사안은 아니겠지요. 테세아트는 베르비스의 제 1항구 셀루안과 가장 근접한 곳…… 테세아트에 군대가 집결하였다면 그 이상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펠리온은 말을 마친 루아리델의 짙푸른 바닷빛 눈을 바라보았다. 루아리델은 눈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그 시선을 받아내고 그를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팽팽하게 당겨진 무거운 침묵만이 허공을 맴돌 뿐, 이펠리온은 대답이 없었다. 루아리델은 재차 물었다.
“베르비스를 치실 겁니까?”
“흠, 그래. 전쟁. 베르비스와.”
이펠리온은 중얼거리듯 대답 아닌 대답을 하고는 그대로 루아리델의 손을 잡아끌어 그녀를 일으켰다. 루아리델은 영문을 모른 채 그에게 이끌려 주저하며 일어섰다. 지익 의자가 끌리며 양탄자 위로 긴 자국을 그렸다.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지다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전쟁을 하는 것도 좋겠지. 수입 협정을 맺고 금화를 지불해가면서 식량과 물자를 들여오는 것 보다는, 아예 베르비스를 치고 제국령으로 복속시켜 직접 관리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지. 칠 가치가 충분히 있어. 아니, 제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지.”
그의 무감정하고 사무적인 말에 루아리델은 다급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매달리다시피 그의 팔을 붙들고 외쳤다.
“제발, 전하, 그 말씀 거둬주십시오. 그 날 제게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이곳으로 오는 대신 베르비스의 안전을 보장하겠노라고!”
이펠리온은 ‘제발……’이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의 소맷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그대로 손목을 쥐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우리 비 전하께서 내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면, 제국의 군사가 델라스트린 해협을 건너는 일은 없도록 해줄 수 있지.”
“무슨……?”
들려오는 반문에 이펠리온은 입술에 비칠 듯 말 듯한 미소를 걸었다.
“오늘 밤은 침대 위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그 말에 루아리델은 얼굴을 확 붉히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거세게 손목을 잡는 손아귀의 힘에 눌려 꼼짝도 할 수 없어 그저 튀어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원치 않는 이상, 전하께서 저를 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전하의 그 말씀을 믿었기에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글쎄올시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전하!”
“애초에…… 베르비스 국왕, 당신 아버지는 이럴 생각으로 당신을 이곳에 보낸 게 아니었던가? 딸을 팔아 나라의 안전을 사는 거지. 뭐, 미카룬 대륙에 있던 나라 어느 곳에서나 흔히 있는 뻔한 이야기지만. 내 말이 틀려?”
“그건……!”
“제국에 팔려온 비운의 왕녀라면 비운의 왕녀답게 수심에 찬 아름다운 얼굴로 상냥한 신랑의 품에 안기면 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침대 위에서 눈물로 젖은 눈으로, 그 귀여운 입술로 간청하는 거지. 전하, 전하께오서 저를 어여삐 여기신다면 부디 저의 모국만은 해하지 말아주소서, 라고.”
그리고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바싹 얼굴을 가져갔다. 안경 너머로 맹금(猛禽) 같은 차가운 금빛 눈동자가 보내는 시선에 루아리델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으나 손이 붙잡혀 있는 탓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뺨에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흠칫 놀라 몸을 빼내려는 루아리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은 채, 나른하게 잠긴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손에 넣어 안았다는 소문이 돌아 왕녀가 쓸데없는 동정표를 사는 건 곤란하지. 그래, 제국 황태자비가 된 베르비스의 왕녀가 조국을 위해 온 몸을 던져 간청했고, 그리고 역시 그런 그녀를 총애하는 황태자가 그녀의 친정을 존중하기로 하여 군사를 물렸다…… 그런 종류의 미담 쪽이 훨씬 좋겠지? 어때?”
이펠리온은 가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의 손은 이제 루아리델의 뺨을 거쳐 당혹함과 두려움에 반쯤 벌어져 있는 그녀의 작은 입술에 닿았다.
“자, 거듭 말하지만, 난 억지로 안았다는 소문으로 내 명예에 흠집 내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거든. 그러니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어? 황태자비가 먼저 안아주길 청했다는 걸 말야. 그래, 먼저 입이라도 맞춰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를 바라보던 루아리델의 깊은 바다와도 같은 눈에 투명한 빛이 일렁여 맺히더니 끝내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 그대로 멍하니 눈앞에 바짝 다가온 시린 금색의 눈동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그의 팔을 뿌리치려 애쓰던 손을 들어 이펠리온의 뺨으로 가져갔다. 뺨 위로 살짝 닿는 손끝이 하얗게 질려 떨리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히 느껴져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이런, 이런.”
이펠리온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자신의 뺨에 닿은 루아리델의 손을 붙들어 떼어냈다. 루아리델은 화들짝 놀라 눈물이 고여 일렁이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펠리온은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입꼬리를 들어올려 웃고 있지만, 햇빛을 반사하는 안경 유리 너머로 보이는 엷은 금색 눈동자에는 어쩐지 쓴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정말이지, 리델 앞에서는 농담도 못하겠다. 장난 좀 쳤기로서니 그렇게 사람 철렁하게 하는 얼굴 하지 말라구. 설마하니 제국이 국가간의 혼사로 맺은 조약을 깨려고 하겠어? 테세아트로의 병력 이동은 그 부근에 최근 출몰하기 시작한 마수 무리의 토벌을 위해서일 뿐이야. 슬슬 테세아트 성의 병력만으로는 제압하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 말이지. 테세아트로 아무리 많은 군사가 이동한다고 해도, 거기서 제국군이 베르비스를 치러 델라스트린 해협을 건넌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황태자비 전하는 그렇게 걱정 할 것 없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루아리델의 손을 놓았다. 그는 떨리는 양 손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꽉 모아 쥐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는 루아리델의 곁을 스쳐 지나가, 테이블에서 미끄러져 양탄자 위로 떨어진 서류들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자, 사랑스런 황태자비 전하와 좀 더 오래 있고 싶지만, 그랬다간 늙은 대신들의 지겨운 잔소리가 쏟아질 게 뻔해서 말이지. 이만 가봐야겠네. 이 몸이 워낙 유능하시니 대신들이 쉴 틈도 주지 않고 부려먹는단 말이야.’ 라며 싱긋 웃고 뚜벅뚜벅 문을 향해 걸어 나가 복잡하게 굴곡이 진 돋을새김의 문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빙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음, 그렇지만 역시 난 혈기왕성한 청년이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고. 사실 참기가 조금 힘들단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소리 내어 웃으며 방을 나섰다. 거대하고 육중한 문이 닫히며 내는 쾅, 하는 커다란 소리와 동시에 루아리델은 그 문 끝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풀림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잡혔던 손목은 기이하게 뜨거웠지만 손끝은 외려 겨울바람결이 스치는 듯 차가웠다.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것만 같은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손바닥 안으로 말라붙은 눈물 자욱이 느껴졌다. 그리고 손으로 가려지고 눈꺼풀로 덮인 시야의 뒤켠에서 명멸하는 빛 사이로, 안경 너머에서 빛을 내던 싸늘하기 짝이 없는 금안이, 온화함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던 시선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 금안의 주인이 내뱉던 말에, 심장 깊숙한 곳을 내리 찔러 긋는 듯한 아픔이 몰려왔다. 루아리델은 다시 떨리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손바닥 안으로 떨어져 내리는 차가운 눈물을 눌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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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설명을 조금 하자면, 이 글의 시점에서의 리델은 말하자면 정략 결혼으로 팔려온 신부입니다. 주변 소국가 점령을 통한 영토 확장을 꾀하고 있는 제국에 불안을 느낀 베르비스 왕국 측에서 공주인 리델을 제국의 황태자비로 주는 대신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이지요. 사실 이 결혼에는 반대한 사람이 많았지만 이펠이 여러가지 수를 써서(...) 어쨌든 성사가 되었고, 현재 리델은 제국 수도인 카셀라로 들어와 일단은 황태자비입니다. 이 과정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지만 이건 단문 24제니까 여기서 다 말할 것은 아니고요....
음 뭐랄까 쓰고나니까 안경이라는 제목이랑 전혀 상관없네요 와하하하? ㅇㅂ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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