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hwp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찾아냈습니다. 이런 것도 써놨었군요;; 카르에이나 크로니클의 일부 대목들(물론 나중에 가서는 수정되고 삭제될지도 모르지만) 입니다.
일단은 하르미엔의 이야기. 초반부쯤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찰박, 찰박.
내키지 않아 한 발짝 한 발짝 더디게 내딛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이하게 질퍽하고 들치근하게 달라붙는 물이 성가시다. 그 기분 나쁜 질척거림에 발을 멈추어 서서 뒤돌아본다. 가지 않으면 안 될까, 라고 말하는 듯이.
그러나 머뭇거리고 있을 틈도 없이 누군지 모를 손이 뒤에서 등을 떠민다. 작은 발끝과 발가락 사이에 휘감기는 미지근함을 꾹 참고 다시 발을 내디딘다. 손에는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도록 담겨 있는 하얀 사기그릇이 들려있다. 그것을 쏟지 않도록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조심스레 발걸음을 뗀다.
얼마나 걸었을까, 줄곧 어두컴컴하던 주위에 빛이 스며든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져 침침하니 아리다. 비쳐드는 빛에 눈을 찡그려 좁아진 시야에 무언가 주위와 이질적인 존재가 걸린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본다.
푸득, 날개를 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커다랗고 흰 새 한 마리가 경계하듯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새를 향해 손을 뻗어 부른다.
이리와.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기에 그저 손짓만으로.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잔뜩 경계하며 움츠린 저 하얀 새는, 자신이 부르면 결코 경계하지 않고 다가 올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리 오련.
다시 한 번 눈짓으로 부르자, 새는 그 날개를 퍼덕여 이쪽으로 날아온다.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깨끗한 깃털이 고르게 나 있는 큰 날개를 접고 얌전히 팔위에 앉는다. 한동안 말없이 새의 동그스름한 머리를 쓰다듬기만 한다. 흰 새의 몸은 날씬하고 우아한 선을 그리며 주위보다 한층 밝은 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은 듯, 다른 손에 있던 물그릇을 그 부리 밑에 내민다. 하얀 새는 잠시 머뭇거리듯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하다가, 이내 그릇에 부리를 대고 담긴 물을 천천히 들이마신다.
갑자기 물을 마시던 하얀 새가 소리도 없이 몸을 부르르 떤다. 그리고 사방에서 새까만 어둠이 다시 밀려든다.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린다. 챙강, 소리가 나며 흰 그릇은 산산조각난다.
하얀 새는 처음에는 힘겹게 조금씩 퍼덕여 보려던 날개 끝을, 이윽고 점차 몸 전체를 서서히 경직시키며 바닥으로 추락한다. 곧장 추락한 하얀 새는 그대로 움찔거리다가, 이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원망하는 듯한 눈동자로 응시한다. 그 은수정같은 눈동자의 이지러지는 빛은 점점 탁해져 그 누구도 비추지 못하게 되어간다.
가슴 밑바닥부터 싸하니 밀려오는 공포로 미미하게 떨리는 손을 뻗어, 하얀 새의 축 늘어진 머리께에 대어본다. 그 손가락 끝이 닿는 순간 하얀 새는 갑자기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인의 형상으로 변한다. 얼굴은 바닥을 향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밑으로 꿀럭꿀럭,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액체가 배어나온다. 미지근하고 질척한 액체는 번져 발끝까지 와 닿는다.
화들짝 놀라 그 액체에 손을 대려 하자, 어디선가 갑자기 차갑고 끈적이는 손이 뻗어 나와 눈을 가린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끌어당긴다. 순간 갑자기 전신을 엄습하는 본능적인 거부감.
싫어.
비켜.
그 손을 떼란 말이야.
나는 저것의 최후를 지켜봐야 해-!
눈을 가린 차가운 손, 팔을 붙든 억센 팔에서 벗어나려 미친 듯이 발버둥친다.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지켜봐야만 해, 최후의 최후까지, 절대로 눈을 떼지도, 감지도, 외면하지도 말고-
내겐 그럴 의무가 있어!
기어코 나와 주지 않는 목소리, 결국은 온 몸으로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차갑게 식어가는 손과 발을 휘젓자 미지근한 물방울의 둥근 파편이 곳곳으로 튄다.
아니, 물이 아니야.
이 끈적하고 질척하게 엉겨 붙는 이것은……
피-
그것을 깨닫는 순간 견딜 수 없을 만큼 역한 피 냄새가 코끝에 엄습한다. 마치 거센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던 제방이 터져 물이 넘쳐흐르듯 피가 흐르고 그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 온통 어두운 시야 속에서 질퍽하게 휘감기는 그 냄새의 광풍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아 더욱 더 필사적으로 눈앞의 손을 떼어내려 발광하듯 움직인다.
그러나 말랑하고 부드러운, 도톰한 발은 여전히 시야를 새카맣게 가린 채 떨어질 줄 모르고 눈가를 짓누르고 있을 뿐이다.
……뭐? 발?
하르미엔은 뭔가에 눌려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눈을 떴다. 그러자 시야에 걸리는 것은 조금 전까지 눈을 가리고 있던 차가운 손이 아니라, 인간보다 높은 체온을 가진 따뜻하고 말랑하게 도톰한, 고양이의 앞발이었다. 일어날 때까지 몇 번이고 눌러주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듯 그 앞발은 하르미엔의 눈가를 꾹꾹꾹 누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카르헨.”
하르미엔은 나무라듯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휘저어 눈가에서 앞발을 떼어내어 그러쥐고 벌떡 일어났다.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털에 호박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고양이 카르헨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좀 더 정상적인 방법으로 깨울 수는 없는 거니?’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두 앞발을 잘잘 흔드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딴청을 피우듯 냐아, 하고 한 번 울어 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하르미엔의 손을 뿌리치고 휙, 공중에 호선의 궤적을 그리며 침대 위에서 바닥으로 유연하고 가볍게 뛰어 내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르미엔은 그런 카르헨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그대로 상체만을 일으킨 채 침대에 앉아 조금 전의 감각을 상기해보았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감각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감각들이었다. 마치, 아득한 과거에 겪었던 일들이 흔히 그러하듯 흐릿하게 퇴색된 듯 하면서도 명료하게 피부 끝에 닿아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하르미엔은 고개를 저었다. 악몽을 꾸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엇을 새삼스레. 체온으로 덥혀져 있다가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이불을 젖히자 침대 밖의 싸한 아침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밤새 꿈을 꾸며 땀을 잔뜩 흘린 모양이었다. 하르미엔은 깊게 심호흡을 해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께에서 찰랑거리는 검고 곧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강 추려 끈으로 묶었다.
방 한쪽의 커다란 창문을 가린 자주색의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열어보았다. 한겨울의 빛나는 차가움을 한껏 품은 아침 공기가 볼을 스치며 화악 밀려들었다. 하르미엔은 쏟아지는 겨울 아침 햇빛과 바람에 멍한 머리 속을 씻어내려는 듯 한껏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시 서 있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폐부를 훑는 새로운 바람, 피부를 스치우는 익숙한 아침 내음.
또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변함없는, 그러나 어제와는 조금도 같지 않은 하루가.
“하르미엔 아가씨, 일어나셨나요?”
묵직한 진갈색의 나무문을 똑똑,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문 저편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르미엔은 밤새 뒤척였는지 여기저기 구김이 간 얇은 흰색 슬립을 대충 손으로 다듬어놓으며 대답했다.
“응, 들어와.”
그녀의 대답에 문이 살짝 열리고, 약간 밝은 갈색의 굽슬거리는 머리칼을 어깨에 닿는 길이로 늘어뜨린 부드러운 미소의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대야에 담긴 물로 얼굴을 씻고 있는 하르미엔에게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라며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하르미엔의 곁에 있다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거울 앞 작은 의자에 앉히고 머리 손질을 하려던 그녀는 하르미엔의 흑발이 대충 흐트러진 그대로 질끈 묶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끈을 황급히 풀어내며 나무라듯 말했다.
“아가씨, 이렇게 머리를 거칠게 묶어놓으시면 안돼요. 머릿결이 다 상한다구요.”
능숙하게 머리를 다듬는 그녀의 손길에 머리를 맡긴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하르미엔은 대충 흘려보내듯 대답했다.
“아아, 그랬던가.”
하르미엔의 성의 없는 대답에 그녀는 조금 뿌루퉁하게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랬던가가 아니잖아요. 몇 번이고 말씀드렸는데도 아가씨는 정말…….”
“미안, 레이엔느.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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