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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희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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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에 '서양 고대 신화와 역사'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교수님의 편애 성향;;으로 인해 신화의 범주 중 특히 영웅 서사시에 대한 강의를 집중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포스팅에서도 보셨듯이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영웅서사시 이론서(사실상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신화학 전반에 관한 이론서) 를 필수적으로 읽게 되었는데요. 그 내용 중 츄츄와 연결되어 심히 심장을 때리는 부분이 있었기에 관련해서 포스팅해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고찰이라기보다는 단편적으로 연상되는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적어본 것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좁은 식견을 바탕으로 한 사견입니다. 감안해주세요. *26화 전체를 시청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되니 결말에 관한 미리니름에 주의해주세요.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해피 엔딩은 허위 진술로 경멸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보아온 한, 이 세계에는 하나의 종말, 즉 죽음, 붕괴, 의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던 형태가 사위어감에 따라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p.39 사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은 현실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나 꿈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현실입니다. 영원한 사랑도, 영원한 충성도, 우정도 맹세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스러져가는 허망한 세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점점 신화적 발상과 제의가 인류의 일상 생활에서 분리되어 가고, 그 자리를 합리주의와 이성 중심의 사고 방식이 대신 채워 가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기에 현대의 인류에게 해피엔딩은 위에서도 말했듯 '허위 진술'로 인식되어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화가, 영웅의 이야기가, 동화가 '유치한 거짓 이야기'로 치부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사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현대 뿐 아니라 현대 철학의 근원이 된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만) 그리고 그러한 형식의 유치함 혹은 진부함에 의해 그 속에 담은 작가의 메시지가 아무리 진실되어도 그 빛이 가려지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영원히 행복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작품의 결말은 유치하고 뻔하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지요. 프린세스 츄츄 역시, 보잘것 없는 오리가 오로지 진실된 마음 하나만으로 여자 아이가 되고, 나아가 사랑-그것이 왕자의 것이든 기사의 것이든-을 얻는 공주님이 된다는 이야기는 할래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단 표면상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제작진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 저연령층에게만 전하고 끝날 것은 아니었을테니까요. 너무나 잘 알려진 동화에서 가져온 모티프와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의 원형적 구조라는 두가지의 전형성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이 영웅 서사시의 원형적 구조와 츄츄의 서사 구조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프린세스 츄츄가, 유치하다는 평을 듣지 않기 위해 전형적인 결말 구조를 사용하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강하게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사명에 직면했다면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어떠한 어둠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놓지 말라고, 자신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지금의 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있는 힘껏 하라고 외치는 작가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시청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라면? 그래서 선택한 길이 '모든 등장인물이 (나름대로) 행복해졌는데 시청자만 불행해졌다'는 평을 듣는, 예의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히루는 결국 오리 한 마리로 되돌아 가 금관 마을의 모두에게 잊혀지고, 화키아는 글을 쓰게 되고, 뮤토는 동화속으로 돌아가고, 루우는 진실한 사랑 고백의 보답으로 뮤토와 함께 동화속으로 향하게 되는. 머리로는 납득할 수 있는 만큼, 그러나 가슴에는 어쩐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놓을 만큼의 배드엔딩과, 현실과 동화가 뒤섞인 불안정한 세계에서 모든 것이 결국 원래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가고 평화가 깃든 세계로의 변모라는 해피엔딩. 프린세스 츄츄가 선택한 엔딩은 이 두가지 재료를 반씩 섞어 만든 엔딩이었던 것입니다. '행복을 다루는 동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에 거덜날 운명에 놓여있다.' - 같은 책, p.42 잠시 동화와 같은 꿈을 꾸었던 아히루는 현실의 매섭고 잔혹한 광풍 앞에 결국 다시 자신의 원래 모습인 한 마리의 오리로 되돌아오지요. 아름다운 튀튀를 입고, 평소라면 추지 못할 아름다운 춤을 추며, 왕자님의 연모를 받는 동화는 아무리 행복하고 아름다워도 현실이 아니었던 겁니다. 잠시 드롯셀마이어의 힘으로 현실과 섞여 그 힘과 실체를 얻은 동화이지만, 이는 결국 현실 앞에서 언젠가는 스러질 모래성과도 같았던 것이지요. 애초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 '동화 속 인물'이었던 프린세스 츄츄는 그 역할이 다하면 사라질 운명이었고, 프린세스 츄츄가 되기 위한 물질적(혹은 육체적?) 기반이었던 '소녀 아히루' 역시 동화가 현실에서 완전히 분리됨에 따라 그 존재가 지워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를 통해 프린세스 츄츄는 누구나 아이들 나라를 꿈꾸지만 결국 발을 딛고 서 있는, 되돌아와야할 곳은 여기 어른들 나라, 즉 현실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돌이켜 볼 때, 어른들을 위한 잔혹 동화라는 평가에 어쩐지 수긍이 갑니다.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超絶性)으로 읽히어야 한다. (중략)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는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 같은 책, p.42~43 하지만 실상 완벽한 해피엔딩이 존재하지 않듯이, 완벽한 새드엔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린세스 츄츄의 엔딩을 섣불리 새드엔딩이라고 부를수만은 없는 것도 그러한 연유겠지요. 비극인 동시에 희극인 일이 현실에 비일비재하듯이. 그래서, 실상 '프린세스 츄츄'라는 인물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희극과 비극, 빛과 어둠, 선과 악 모두를 끌어안은 여신의 형태가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26화에서 커다란 백조의 날개를 가진 형상으로, 모든 것을 어둠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빛을 발하던 모습처럼. 모든 신화와 영웅서사시가 그러하듯, 프린세스 츄츄의 모든 인물들도 결국 최후에 적대자와 자신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고 그 존재와의 화합을 통해 세계의 진실을 끌어안게 됩니다. 대립물인 까마귀의 피가 흐르게 된 왕자 뮤토. 까마귀의 딸이라는 적대적 여인상과 왕자에게 선택받은 공주라는 여인상을 통합한 루우. 작가와 기사라는 두가지 모순되는 정체성을 모두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인 화키아. 사라져야 할 운명의 보잘것 없는 오리라는 점과 모두를 구원했다는 위대함을 동시에 끌어안은 아히루. 이들은 모두 단일한 경험을 공유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 자신의 두 발로 딛고 일어섭니다. 이야기와 현실속에서 자신을 찾는 이 아이들에게, 통합성이라는 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속성은 없을 듯 합니다.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뒤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 <비실재적>이기 떄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같은 책, p.43 츄츄는 '동화'이기에 그 허구성에 대한 면죄부를 얻습니다. 이상한 것이 이상하지 않은 마을, 이야기가 만들어낸 환상이 현실로 뛰쳐 나오고 현실이 환상속에 매몰된 공간.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없다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개미핥기가 발레를 하고 고양이가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것 등이 '작품 내의 문법적으로'는 타당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츄츄가 마음의 조각을 찾아 뮤토에게 되돌려주는 일 역시, 어떤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승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조금씩 진전되어가는 심리적인 승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신화의 제신(諸神)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중략)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같은 책, p.65 이 대목이야말로 프린세스 츄츄의 팬들이 그 엔딩에 충격받고 슬퍼하고 또 들추어내면서 가슴 아파하면서도 끝끝내 이 작품을 놓지 않고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자비하리만큼 너무나 깔끔하게 결말을 내버리고 떠나간 프린세스 츄츄이지만, 그 작품 속에서 이 이야기가 자신에게 지니는 의미를, 빛을 찾아내면서 츄츄 팬들은 윗 글에서 말하는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어떤 절대적인 '공포'를 느끼기 보다는, 그 서사 구조속에서 움트는 욕망들을 바라보며 오히려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프린세스 츄츄의 모든 시청자들은 자아를 찾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네 아이들의 욕망, 이야기를 자신이 원하는 비극으로 이끌고자 하는 작가 드롯셀마이어의 욕망,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하며 마음속 깊은 곳의 소망이 화면에 발현되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의 욕망들이 얽혀 들어가는 서사에 매료되어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분명 지금까지 있었던 다른 작품과는 차별화된 신선함(너무나도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사실은 치명적인-요소 하나를 비틀어 내보임으로써 생겨나는 의외성으로부터 도출된 무언가)으로 다가오기에, 종영된지 몇년 뒤에도 그 빛이 퇴색되지 않은 채 찬연히 살아있고, 그것이 또 수많은 분석과 감상과 팬워크로 이어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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